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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 따라잡기/연구/논문

문화 저널리즘의 반성과 모색] 인터넷 시대의 저널리즘 균형과 깊이로 경쟁해야

(이 글은 언론도서관에서 가져왔습니다)



[문화 저널리즘의 반성과 모색] 인터넷 시대의 저널리즘 균형과 깊이로 경쟁해야



언론 문화비평의 현재와 과제


문화 저널리즘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신문 문화면의 권위와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 지도 이미 10여 년을 헤아린다. 


공영방송의 책 프로그램은 교양과 예능을 전전하다가 아예 자취를 감춰버렸고, 고전음악이나 문화정보 프로그램은 편성철마다 홀대받기 일쑤다. 


문학·영화·공연 등 예술 분야의 전문지는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다가 하나둘씩 문을 닫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니 신문·방송·잡지 중심의 문화 저널리즘(cultural journalism)이 몰락 가도에 놓여 있다는 비관적인 진단이 대세를 이룬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전통적으로 문화 저널리즘은 좁은 의미의 예술 저널리즘, 이른바 ‘고급예술’에 관련된 언론활동과 거의 동의어처럼 여겨져 왔다. 그런 ‘엘리트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문화 저널리즘의 침체는 부인할 수 없는 대세다.


하지만 고급예술만이 아닌 대중예술과 민속예술 역시 예술이라는 상대주의적 관점에 선다면, 나아가 문화가 예술이나 문화산물 수준을 넘어서는 ‘총체적 삶의 방식’이라는 ‘인류학적’ 관점에 선다면, 사정은 좀 달리 보인다.

 

문화 저널리즘은 약화되기는커녕 그 외연과 대상 영역을 계속 확장해왔으며, 단지 ‘고급예술’ 위주로부터 대중문화, 라이프스타일과 소비문화 위주로 빠르게 변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몇몇 연구는 그와 같은 추세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고급예술에서 대중문화로 중심추 이동


우선 넓은 의미의 예술 저널리즘(고급예술, 대중예술, 민속예술 포함) 안에서 세력 판도의 변동은 사뭇 뚜렷하다.

 

전체적으로 고급예술에 비해 대중문화 기사가 점점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해가는 실정이다. 


장르별 세력 관계 또한 변화하는 양상을 드러낸다.


1965년에서 1990년까지 네덜란드 신문들의 예술보도 추세를 분석한 수전 얀센(Janssen, 1999)의 연구에 의하면, 권위지에서는 문학과 영화, 대중지에서는 뮤지컬과 쇼 관련 기사가 꾸준히 증가했다. 


또 권위지와 대중지 모두에서 대중음악의 위상이 매우 높아진 반면, 연극과 고전음악은 하락세를 보였다. 


1987년부터 2007년까지의 중앙일보의 예술·연예기사 추이를 분석한 홍은희(2012)의 연구에 따르면, 국내에서는 영화·드라마·음악 장르의 부상과 연극·무용 장르의 쇠퇴가 두드러진다.


문화 저널리즘이 고전적인 예술의 범주를 넘어서 범위를 더욱 확장해가는 경향도 눈에 띈다.

 

이는 예컨대, 언론사 문화부에서 다루는 분야의 확대라든지, 학술연구에서 문화 저널리즘을 새롭게 정의하는 시도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제 문화 저널리즘은 예술 이외에도 라이프스타일(일상생활, 여가, 취미, 인간관계, 심리, 웰빙 등)과 소비(자동차, 패션, 요리, 주거, 여행, 테크놀로지 등)까지를 포괄한다(Kristensen, 2009).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과학(학술, 의학, 과학 등)을 포함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문화 저널리즘의 ‘광역화’는 소비문화의 확산, ‘문화경제’의 성장 및 ‘일상생활의 심미화’ 같은 사회경제적 변동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는 현상이다. 


즉 문화재화는 이전보다 훨씬 더 쉽고 광범위하게 일반 재화나 다를 바 없이 소비되고 있으며, 소비재는 문화재화 못지않게 그 상징적·문화적 가치가 중요해졌다. 


크리스텐슨과 프롬(Kristensen & From, 2012)은 이 과정에서 예술과 라이프스타일, 소비 저널리즘이 서로 구분하기 어렵게 뒤섞이며, 그들 사이의 경계 역시 흐려지는 징후를 포착한다.


이것이 비단 그들이 연구한 덴마크에만 한정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홍은희의 논문은 1990년대 이후 문화기사가 대형화하고 문화면을 벗어나 전 지면에 진출했음을 보여준다. 


또 2008년 6월 조선, 중앙, 한국, 한겨레를 한 달간 비교분석한 김세은(2009)의 연구에 의하면 문화면에 실린 기사 가운데 생활 관련 기사(패션, 미용, 취미, 여행, 요리, 맛집, 건강 등)는 약 33%에 달했다.


이와 같은 변화를 어느 정도 반영하는 동시에 강화하는 현실이 바로 저널리즘 실천상의 패러다임 전환이다. 


고급예술 위주의 전통적인 문화 저널리즘은 여타 저널리즘 영역과는 차별화된 특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서구의 경우 문화부 기자는 다른 부서보다 전문성을 갖춘 고학력자의 비율이 높은 편이었다. 


이들은 또 객관성·중립성·속보성과 같이 다른 언론인이 공유하는 뉴스 가치에 거리를 두는 성향이 강했다.



문화 범위 확장… 맛집, 웰빙도 ‘문화면’ 실려


한데 그런 상황은 이제 크게 변화하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주관성과 가치판단을 중시하는 미학적 비평은 점점 쇠퇴하고, 그 자리를 문화상품이나 문화예술인을 소재로 한 보도 기사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헬만과 야콜라(Hellman & Jaakkola, 2011)는 이런 맥락에서 예술 저널리즘의 전통을 지배해온 심미적 패러다임이 저널리즘적 패러다임으로 이행하고 있다고 핀란드의 사례를 들어 지적한다(< 표1 > 참조).





예술 영역에서조차 그럴진대, 라이프스타일이나 소비 영역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또한 문화 저널리즘의 전문성이 약하고 비평이 활성화되어 있지 못하다는 비판을 익히 수십 년째 들어온 국내 사정이 핀란드와 크게 다르리라고 볼 이유도 없을 것이다. 


김세은의 논문에 따르면 우리 신문들의 문화예술기사 가운데 정보 소개가 70% 가량으로 압도적이고, 설령 해설 형식이라 하더라도 비평보다는 감상문, 체험기 정도에 머무는 기사가 대부분이었다.


또 홍은희의 논문에 기대자면, 외부기고자의 글은 기사 대상에 대한 호오의 입장을 비교적 명확히 드러내는 반면, 전체 기사의 약 80%에 달하는 기자들의 글은 주로 우호적이거나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비평의 부재 내지 기피가 우리 문화 저널리즘의 중요한 특징이라는 의미다. 


게다가 문화 저널리즘의 패러다임 전환 속에서 그런 특징이 향후에라도 변화할 가능성은 더욱 적어지고 있는 셈이다.


종합적으로 문화 저널리즘은 단순한 쇠락의 위기에 처해 있다기보다는, 질적인 변환의 시기를 맞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국내외의 매스미디어가 공히 겪고 있는 변화이기도 하다.

 

언론인이 그런 기회에 어떻게 대처인용해 나가느냐에 따라 장차 우리 사회의 저널리즘뿐만 아니라 문화 지형 또한 크게 달라질 것이다.

 

이런 전제 위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제에 관한 언론인의 진지한 성찰이 필수적이다.



뉴스 연성화 불가피해도 균형감각 잊지 말아야


일단 문화 저널리즘의 확장이 ‘뉴스의 연성화’ 경향을 주도하고 있음은 부정하기 힘들다. 


여기에 굳이 가치판단의 잣대를 들이댈 필요는 없다. 저널리즘 내용이나 형식상에 재미와 오락성, 일상성이 강조되고 뉴스 장르 간 혼종성이 증가하는 현상은 언론사의 상업주의로 인한 것만은 아니며, 반드시 수용자의 탈정치화를 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차원의 사회문화적 변화 및 그에 따른 수용자들의 적극적인 요구와도 어느 정도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과 같은 사회에서 그 누가 대중문화, 라이프스타일, 소비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세상이 점점 더 복잡해져갈수록 일상생활과 문화를 구성하는 여러 선택과 결정, 소비 문제에 지침과 참고사항을 제공해주는 ‘서비스 저널리즘’의 대중적 수요 역시 증대할 것이다.


다만 그런 추세를 일정하게 불가피한 것으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저널리즘 미디어가 거기 대응하는 방식이 수요 종속적이기만 해서는 곤란하다. 


그 이유는 주로 두 가지 사실에서 비롯한다. 


우선 문화예술의 발전이 다양하고 심도 있는 비판적 문화 저널리즘에 의존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제도화된 매스미디어가 어떻게든 공적 책임을 가진다면, 비평의 장을 마련해 문화예술의 다원성과 질적 수준 향상에 기여하는 일은 그 책임을 수행하는 하나의 훌륭한 방법이다.


이 점에서 미국의 사례는 시사적이다. 


미국 언론계의 예술보도에 대한 2004년의 NAJP(National Arts Journalism Program) 보고서는 전반적인 예술 저널리즘의 퇴조 속에서도 전국 혹은 지역의 신문·방송사가 고급예술과 대중예술, 비평과 정보 기사 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NAJP, 2004). 


우리 언론계 역시 공익과 문화 발전을 위해 그런 태도를 능동적으로 취할 필요가 있다. 창의적인 저널리즘의 형식 실험 또한 바람직할 것이다.


신문·방송의 문화 저널리즘이 서비스 저널리즘 수준에만 머물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제도화된 매스미디어가 인터넷 시대에 생존할 수 있는 중요한 방책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미디어들과의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기존의 신문·방송이 의지할 수 있는 자원은 오랫동안 사회제도로서 축적해온 상징자본(전통·권위·명성·신용), 품질과 신뢰성 면에서 차별 가능한 정보의 생산일 수밖에 없다.



인터넷 연예미디어와 경쟁은 자충수


수용자가 일상적으로 문화정보와 비평을 구하는 곳이 인터넷 포털과 카페와 블로그 같은 온라인 공간으로 이행했다고 해서, 문화예술 담론생산의 중심축마저 그쪽으로 이동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영화 부문의 파워블로거를 대상으로 한 김지현·이상길(2012)의 연구는 사실 이런 온라인 문화매개자들이 아직까지는 기존의 문화저널리즘에 상당히 의존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음을 알려준다.


더욱 권위 있고 믿을 수 있으며 심층적인 보도와 해설, 비평이야말로 인터넷 시대에 매스미디어의 문화 저널리즘이 지속적으로 추구해야만 하는 경쟁력이다. 


따라서 신문사들이 인터넷 연예미디어들과 경쟁하면서 그들과 똑같은 방식(속보성·홍보성·낚시성 기사와 가십·스캔들 기사)으로 문화 저널리즘을 실천한다면, 이는 장기적으로 심각한 자충수가 될 것이다.


선정주의는 약간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막대한 상징이윤을 지불하는, 어리석은 근시안적 장사 요령에 지나지 않는다. ‘사소한 문화기사쯤이야’ 하면서 언론사가 수용자의 신뢰를 두고 작은 배반을 거듭한다면, 혹은 지금 남아 있는 신뢰를 더욱 키워가지 못한다면, 이는 궁극적으로 미디어 제도 전반에 대한 불신과 냉소를 낳게 될 것이다. 


그런 상황으로부터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쪽은 결국 가장 많은 신용자산을 확보하고 있었던 기존 언론사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불행은 우리 모두의 것이 되겠지만 말이다.


이상길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이글은 언론도서관에서 가져온 것 입니다 

출처 - http://kpfbooks.tistory.com/17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