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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 따라잡기/기타

현실적인 기자교육은 어떻게

(이글은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가져온것 입니다)


현실적인 기자교육은 어떻게

언론사, 장사꾼 속성 버리고

‘언론윤리’ 교육해야


김세은 / 강원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요즘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참담’이다. 무너져버린 한국 사회, 여기저기서 너나 할 것 없이 분노와 좌절, 무력감과 우울감을 호소한다. 무릇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크나큰 시련의 시기를 겪어내고 있다. 끔찍한 비극 앞에서 책임을 누구에게 둘 것인가의 문제는 어쩌면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 남겨진 임무는 비극을 비극으로서만 남겨두지 않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참으로 많은 것들이 성찰과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한국 언론, 오래 전부터 망가져 있었다

언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내가 과연 이 글을 쓸 자격이 있는지를 먼저 자문한다. 저널리즘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그동안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주장했던가? 저널리즘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나는 그동안 무엇을 들려주고 무엇을 강조했던가? 조금 더 낫고 못한 것이 지금 이 자리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언론이 무너져내린 현장에서 역설적으로 언론이 바로서야 하는 이유를 보았기 때문이다. 때로는 경찰이고 때로는 판사이며 때로는 의사이고 때로는 선생님이어야 하는 것이 언론이다. 정보가 차단된 상황에서 언론은 유일한 길잡이 역할까지 해야 한다. 새삼 그 사명과 역할이 참으로 막중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언론은 공공의 적이됐다. 신문이든 방송이든, 보수매체든 진보매체든, 개별 언론사의 존재감보다는 집합적 언론의 존재적, 기능적 한계가 너무도 뚜렷이 부각됐다. 역사상가장 큰 불신과 뭇매를 맞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언론에 대한 시민들의 지탄의 범위와 정도는 심대했다. 방송의 경우는 훨씬 심각하다. 결코 혼자 죽지 않겠다는 각오로 전 보도국장이 그간의 의혹들을 시시콜콜 확인해주면서 마치 자기가 의인인양 방송 개혁을 요구하고 있으니 참으로 요지경이 따로 없다. 권력에 줄을 대야 사장이 되는 시스템하에서, 그런 사장에게 잘 보여야 주요 보직에 오르는 조직문화 속에서, 어쩌면 방송이 제 기능을 못하고 망가져버린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신문이라 해서 뭐가 그리 다르랴. 받아쓰기에 익숙한 기자가 무심하게 보낸 어마어마한 오보를, 현장을 멀리하는 데스크는 걸러내지 못했다. 우리의 아이들이 기울어 가라앉아가는 배 안에서, 언론 보도를 보면서 가졌을 그 희망을, 그 기대를, 언론은 무참히도 짓밟아 버렸다. 해경이 도착한 것에 환호했던 아이들을 해경이 버렸던 것처럼….


이번 일을 통해 드러난 우리 언론의 문제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기자 개인의 문제부터 언론을 통제, 관리하려는 정치권력의 문제까지, 언론이 언론으로 바로서기 위해 점검하고 고쳐야 할 것은 그차원과 지점이 대단히 포괄적이다. 나는 왜 기자들이 그처럼 현장에서 취재보도 준칙과 동떨어진 일을 벌였는지, 그것이 왜 데스크에서 제대로 걸러지지 않았는지에 초점을 맞춰 생각해 보았다. 재난보도와 관련된 보도 준칙은 없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그러한 준칙이 왜 취재 현장과 편집국에서 지켜지지 않았는가? 대부분의 기자들은 취재보도 준칙이 있는지조차 모른다. 설사 안다고 해도 그것이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중요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에 여러 언론유관단체나 협회에서 준칙또는 규정, 매뉴얼을 만든다고 하지만 사실 이미 있는 것만으로도 내용상으로는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지키는 것이다.



“기업언론을 해체하라”

여기엔 기본적으로 우리나라 언론의 기자교육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아직도 기자교육은 체계적이지않고 대부분 ‘도제식’ 교육에 의존하고 있다. 사람에 따라 중구난방, 어떤 선배를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마침 최근 나온 방송기자연합회의 ‘방송기자’가 “우리, 바보가 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타이틀 아래 기자교육의 현황과 문제점을 다루어 인용해본다. 


“말이 좋아 ‘도제식’ 교육이지, 실상 회사가 맡아야 할 직원 교육을 젊은 기자들에게 전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하는지 매뉴얼이 없다보니 ‘군기 훈련’에 초점을 맞춘다. (…) ‘꺼리’ 없다고 수면 시간을 빼앗기다 보면 취재 윤리는 생각나지 않는 게 당연하다.”

“매뉴얼 대신 구전동화로 배운다. 선배들의 거대한 노하우는 구전동화나 설화처럼 느껴졌다.”

“결국 기자 개인이 어떻게 가르치느냐에 따라 어떤 기자가 탄생하느냐가 정해지는, 좋은 선배 만나면 좋은 기자로 출발할 가능성이 좀 더 커진다.”

그렇게 우리의 기자들은 바보가 되어 간다. 그처럼 어려운 이른바 ‘언론고시’를 치른 사람들이. 

“시스템이 안돼 있으니까 현재로서 최선의 방법은 잘 하는 선배의 취재, 기사를 보고 배우기죠. (…) 방송기자 하면서 바보가 되는 것 같아요.”


얼마 전 박노자는 칼럼에서 “기업국가를 해체하라”고 주장했다. 나는 그의 말을 빌어와 “기업언론을 해체하라”고 주장한다. 해경을 해체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오늘날 한국의 기업형 언론은 해체되어 마땅하다. 내 주장의 핵심은 기자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언론이 기업으로서의 기능, 즉 장사꾼으로서의 속성에 매몰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교육의 문제는 기자의 문제라기보다는 언론사의 문제이며, 그러한 관행과 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언론계 전반의 문제라는 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 “회사 자체에서 하는 교육이 제일 중요하죠. 하지만 비용 문제도 있고, 윗분들은 당장 쓸 인력도 없는데 교육을 꼭해야 하냐는 생각이죠.” 교육에 비용 타령하는 회사가 제대로 된 기사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언론사가 ‘회사’가 되는 순간 기자는 월급쟁이로 전락한다.



정기적인 재교육 필수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펴낸 ‘디지털 시대의 저널리즘 교육’(2013)에 의하면, 최근 2년 내 재교육 경험은 환란 이전인 1997년 38.9%였다가 1999년 12.2%로 급감한 이래 서서히 늘어나 10년만인 2007년 들어 34.5% 수준을 회복하지만 곧이어 2009년 25.2%로 떨어진다. 2013년 시행된 언론인 의식조사에서는 37.1%로 늘어났지만 여전히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거의 모든 응답자인 96.1%가 직무와 관련해 사내외의 연수나 재교육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재교육 환경의 문제로는 ‘과다한 업무량’(41.7%), ‘재교육에 대한 회사의 투자와 인식 부족’(38.0%)이 가장 크고 주요한 두 가지였다. 기업으로서의 언론사 체제가 재교육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얘기다. 재교육의 업무 관련성(9.4%)이나 재교육을 필요로 하지 않는 언론계 풍토(6.7%) 역시 문제점으로 꼽혔다.


언론사들은 지금부터라도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기자교육 시스템 마련에 나서야 한다. 수습기자 교육뿐 아니라 정기적인 재교육 기회를 기자들에게 제공해야 한다. 재교육이 지극히 소수의 인원을 선발해 보내주는 시혜성 연수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재교육은 회사의 시혜가 아니라 기자의 권리라는 인식 전환이 반드시 필요하다. 개별 언론사 외에 협회나 연합회가 주관하는 교육 프로그램도 더욱 다양하게 시행돼야 할 것이다. 기자의 전문성을 얘기하면 늘 따라붙는 질문이 기자가 과연 전문직인가 하는 것인데, 기자가 전문직임을 만천하에 공표하기 위해서는 기자협회나 연합회의 교육 기능과 감독 역할이 대폭 강화돼야 한다. 언론진흥재단의 역할은 더더욱 중요하다. 재교육과 관련해 언론인들이 언론진흥재단에 대해 높은 기대를 갖고 있음이 여러 자료와 조사를 통해 익히 확인된 바 있다. 자체교육을 실시하기 어려운 중소언론사와 인터넷 언론사의 기자교육은 언론진흥재단에서 담당하는 것이 다양한 관점과 목소리를 우리 사회에 건강하게 유지하는 한 방안이 될 수 있다.





‘윗사람 말 안듣는’ 기자

교육프로그램 역시 기자정신과 언론의 책무를 구현하는 현실적이며 윤리적인 내용이 대폭 확충, 강화되어야 한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대부분의 기자교육이 테크니컬하고 미시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있다. 급변하는 언론 환경의 변화를 감안하면 당연한 것이다. 기자들도 그런 내용을 교육받기 원한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서 여실히 드러났듯이,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며 가장 변하지 않는것이다. 기자와 언론의 사회적 역할이나 책무, 저널리즘의 윤리, 언론사 등이 기자교육 프로그램에 ‘필수과목’으로 편성돼야 제대로 된 기자가, 언론이 많아질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여러 정황과 여건상 기자들을 제대로 교육시키기 어렵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왜 언론사가 재난재해보도를 전문으로 하는 기자를 키우지 않는가 하는 의문에 다다르게 된다. 


재난재해보도 전문기자를 언론사마다 몇 명 키워놓으면 이런일이 생겼을 때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텐데. 어디재난재해뿐이겠는가. 환경, 여성, 과학, 그리고 정치나 경제 역시 전문성을 고도로 높여 그 권위와 신뢰를 인정받는 기자는 우리 주변에 흔하지 않다. 책상에서 공부하는 나로서는 그 이유로 비용 문제나 인력 문제를 생각했으나, 언론 현장에서 오래 뛰고 있는 기자의 말은 전혀 달랐다. 전문기자 만들어놓으면 “윗사람 말을 잘 안 듣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설마 했는데, 작금 벌어지고 있는 KBS 사태를 보니 그말이 백번 옳은 것 같다. 말 잘 듣는 조직원을 원하는 언론사는 더 이상 언론사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잘못된 취재나 기사의 기저에 자리하고 있는 그릇된 특종의식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기자에게 특종은 대단한 훈장이요 평생 가는 자랑거리다. 기자만이 가질 수 있는, 가져야 하는 직업적 긍지이며 좋은 기사를 만들어내기 위한 강력한 동기요 동력이기도 하다. 무릇 특종의 대표적 속성은 독점과 신속이다. 남들이 안 하거나 못 하는 것을 혼자서 해야 한다. 남들보다 한발 먼저여야 하는 건 기본이다. 이렇게 기자가 속도 경쟁, 아이템 경쟁으로 내몰릴 때 ‘나쁜’ 취재의 필요조건이 구비된다.


기사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정확성은 언제나 그렇게 빨리빨리 확보되는 것이 아니다. 현대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란 대부분 얼마나 복잡하며, 따라서 난이도 높은 취재를 요구하는 사안이 얼마나 많은가.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기자는 무엇을 선택할까? 우리 언론계 풍토에서, 낙종을 하더라도 정확성을 위해 한발 늦추거나 기사를 포기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오보, 사실 왜곡, 편향, 취재원과의 유착, 무리한 취재 등 각종 윤리 위반이 생겨나기 딱 좋은 구조가 바로 이러한 ‘빨리빨리’를 강조하는 특종문화인 것이다. 다급한 경쟁상황에서 취재보도 준칙 ‘따위’를 떠올릴 ‘여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선정적, 자극적 아이템이 남발하는 것도 그릇된 특종의식의 반영이다.


속보는 이제 아무 의미가 없는 시대가 됐다. 이번 사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결국 우리 사회의 공익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기사에서 공익을 구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익을 중시하는 기자는 윗사람 말을 고분고분 듣지도 않을 것이며, 남들보다 기사를 빨리 만들어내기 위해 무리하지도 않을 것이다. 차분하지만 격조가 있는, 밋밋하지만 충실한, 느리지만(파장과 영향력이) 오래 가는 기사가 진정 훌륭하고 좋은 기사로 대접받는 문화에서 취재보도 준칙은 실천될수 있다. 변화는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